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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화 “커흑….” 단말마가 필립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품이 뜨뜻해지고, 그와 엉켜 있던 강도가 허물어졌다.
놈의 명치에 박혀 있던 검을 뽑은 필립이, 비로소 주저앉았다.
“하악… 하악….”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긴장이 풀리면서, 허벅지와 볼의 화끈함이 비로소 느껴졌다.
강도들과의 전투에서 생긴 상처.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헐떡이던 필립은, 이윽고 모닥불 옆에 앉은 이안을 돌아보았다.
느긋하게 육포를 우물대던 그가 말했다. 세이프파워볼
“남자다운 얼굴이 됐군.” “대체 왜….” 필립이 맥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경과 다닐 때랑은 다를 거라고 했잖아?” “…….” 그게 이런 식으로 다르단 얘기인 줄은 몰랐다고 토로하려던 필립은, 이내 한숨만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각오했다고 말한 것도, 모닥불로 가자고 했던 것도 그였으니까.
이윽고 그가 읊조렸다.
“…어쩌면 나리께선 제가 이런 걸 경험하길 바라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국의 민낯이요.” “의미 부여하긴.” 피식한 이안이 붕대와 천을 필립에게 던졌다.

“응급 처치부터 하고, 일어서라.” “뭐가… 또 남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남은 육포를 한입에 털어 넣은 이안이 장님에게 다가갔다.
그가 시체의 장비를 하나씩 벗기고 품을 뒤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주머니를 터시는 겁니까?” “소유권 이전이라고 하는 거다. 국경 지대에서도 많이 봤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때는 부대로 환수했었습니다. 상대가 해적 출신 야만인들이기도 했고요.” “그럼 이참에 내 주머니 채우는 기쁨도 배우면 되겠네. 네가 죽인 놈들은 네가 털어.” “…….” 필립이 입을 뻐끔댔다.
성기사의 종자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강도가 된 것 같지 않은가.
“못 하겠냐? 그럼 내가 챙기고.” 능숙하게 필요한 물건을 챙긴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필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또한 경험이겠죠.” 대충 응급 처리를 끝낸 필립이 강도의 시체로 손을 뻗었다.
아직 따듯한 시신의 몸 이곳저곳을 뒤적인 것도 잠시.
“……!” 필립의 손에 돈주머니가 딸려 나왔다.
안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반짝이는 은화와 동화.

홀린 듯 응시하던 필립의 입꼬리가, 이윽고 슬며시 올라갔다.
주머니를 품에 챙긴 그의 손길이 바빠졌다.
열정적으로 시체를 벗겨 먹는 그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났네.” 지가 기사인 것처럼 굴더니.
노획은 빠르고 순조롭게 끝났다.


주머니가 두툼해진 이안. 그리고 새 검과 단검, 장갑, 신발, 벨트를 착용한 필립이 나란히 섰다.
그들은 같은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이프파워볼 .
용병들이 운송하던 봉인함.
이안이 볼 때, 용병들의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봉인함이었다.
겉에 정교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
사이 사이로 반짝이는 세공된 마석들.
‘…이걸 장물아비한테 넘기는 게 돈을 더 벌었을 것 같은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필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저만 열어 보고 싶은 겁니까?”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게임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호기심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내가 건너뛴 퀘스트일지도. …이왕이면 낮에 열어 보고 싶은데.’ 봉인함의 고리를 쥔 이안은 슬쩍 아공간을 열었다.
하지만 자성이 밀어내는 듯한 느낌만 들 뿐, 넣어지지 않았다.
‘역시, 안 되나.’ 생명체를 넣으려 하면 생기는 반발력이었다.
봉인됐으니 혹시나 했건만.
어쩔 수 없지.
결정한 이안이 단검을 뽑았다.
“물러나 있어라.” “옙!” 필립이 냉큼 옆걸음질 쳤다.
단검에 마력을 흘려보낸 이안은, 상자의 이음새 부분에 박힌 마석을 힘껏 후려쳤다.
빠각!
세 번 만에 마석에 금이 갔다.
다른 마석들의 빛이 잦아들었다.
잠깐의 적막. 곧이어 봉인함의 뚜껑이 벌컥, 예고도 없이 열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형체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놈과 뒤엉킨 그가 바닥을 굴렀다.
쿵, 이안의 등이 나무 둥치에 부딪혀 멈췄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놈의 생김새를 눈에 담았다.
잿빛 머리칼과 뾰족한 귀. 검붉은 눈동자.
‘요정? 이거 설마….’ 이안의 눈이 가늘어질 찰나.
요정의 긴 머리칼이 망토처럼 주위를 가렸다.
동시에 놈의 입이 기괴한 각도까지 벌어졌다.
톱날 같은 이가 한가득 돋은 아가리가 가까워졌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뻗었다.

달려들던 아가리가 홱, 궤도를 틀어 검날을 깨물었다.
까득- 빠지직.
단검이 장난감처럼 부러졌다.
퉤, 부러진 날을 뱉은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놈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심지어, 아름답게. 세이프파워볼
이안의 눈에 이채가 서리는 가운데, 그를 응시하던 요정이 문득 내뱉었다.
“너,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네.” 히죽 웃은 그녀가 이안을 밀치며 물러났다.
둥치에 등이 짓눌린 이안이 인상을 구겼다.
그 사이 공중을 핑그르 돈 요정이, 고양이 같은 자세로 봉인함 위에 착지했다.
광택 없는 잿빛 머리칼이 망토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피 때문에 미친 건 줄 알았는데… 원래 미친 년이었나.’ 이안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일어섰다.
저 여자는 그가 알기로, 이 세계의 유일한 흡혈 요정이었다.
진혈을 마시는 자, 테사이아.
장차 루 사드의 뱀파이어 군주를 흡수해 진혈의 여제로 거듭나는, 꽤 비중 있는 보스 캐릭터였다.
‘가만, 루 사드의 의뢰인이란 게 뱀파이어였나…?’ 자세한 사연까진 알 길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테사이아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야성적이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때, 사방의 시체를 훑어보던 테사이아가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혼자서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어쨌든 고마워, 대신 죽여 줘서.” 자루만 남은 단검을 내던지며 이안이 대꾸했다.
“평소에도 고마우면 목덜미를 뜯어 버리려고 하냐?” “배가 고파서 그만. 사실 지금도 군침이 돌아. 하지만 보아하니….” 싱긋, 요정이 미소 지었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설핏 드러났다.
“넌 지금 내가 어떻게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네.” “잘 아네.”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할 건지도 알고 있겠지?
이안은 속으로 뇌까리며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러니까 다음을 기약할게. 또 만나. 그전에 죽지 말고.” 그녀가 그대로 솟구쳤다.
잿빛 머리칼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펄럭이며 멀어졌다.


화살처럼 빠른 속도.
“…….”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튀어 버릴 줄이야.

숨을 죽이고 있던 필립이 그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저거… 안 쫓아가셔도 되는 겁니까?” “저걸 어떻게 따라가?”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언젠간 알아서 찾아오겠지. 선언했듯이.” “대체 뭐였을까요. 보통 요정 같진 않았습니다만.” “당연히 보통 귀쟁이가 아니지. 저년은 흡혈 귀쟁이다.” “피… 를 빨아 먹는다고요? 요정이요? 말이 됩니까?” “원래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야, 필립.” 이안은 피를 마시는 요정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테사이아를 만난 건 다른 지역이었으니, 당연히 외지의 소문이 흘러들어온 건 줄 알았었는데.
정말로 이 촌구석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하긴, 제국을 제외하면 마물이나 마족이 숨을 만한 지역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외곽의 모든 왕국에 아겔 란만큼의 타락자들이 암약 중이리라 생각하는 게 차라리 합리적이었다.
“…그럼, 저희가 그런 엄청난 괴물을 풀어 준 거군요.” “놔둬도 어떻게든 탈출했을 거다. 애초에 이깟 용병들한테 잡힌 것도, 낮이라 그랬겠지.” 이안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부업으로 강도질이나 하는 놈들이 운반자인데. 루 사드까지 무사히 돌아갔을 리가 없어.” “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긴 합니다만.” 못내 꺼림칙한 듯 읊조린 필립이 어둠을 응시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도 그러는 게 좋을 거다. 마음이라도 편해야지.”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거란 말씀은 아니시겠죠?” “왜 아니겠어?” “하… 루 솔라여….” 필립이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시체 사이에서 새 단검을 주워든 이안이 봉인함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말이나 끌고 와. 이동할 거니까.” “이렇게 바로요?” “그럼 피 냄새 맡은 놈들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릴래?” 필립의 한숨이 깊어졌다.
여기서 멀어지려면 새벽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윽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몸을 돌렸다. 파워볼사이트
그사이 봉인함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이안은, 장비를 점검하고는 안장에 올라탔다.
떠돌이 용병과 그의 종자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들과 잦아 들어가는 모닥불만이 고요하게 일렁인 것도 잠시.
어둠 너머에서 크고 작은 안광들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은 아겔 란의 청소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른델은 누더기로 기운 도시처럼 보였다.
고대 요정의 성을 멋대로 증축한 내성이 언덕 위에 삐죽했고, 외성 안팎으로는 주민들의 거주지가.
나무 말뚝으로 두른 울타리 너머에는 이주민들을 위해 급조한 판잣집들이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통일성이라고는 없었지만, 도시의 규모만큼은 아겔 란에 필적했다.
판자촌에 위치한 여관도, 그에 걸맞은 크기를 자랑했다.
처음에는 집이 없는 이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던 여관은, 지금은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든 용병들의 아지트였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도시에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넘쳐나는 법이었으니까.
오늘도 번 돈을 고스란히 탕진하는 자들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끼이이여관 문이 시끄럽게 열렸다.
두 사내가 장내로 들어섰다.
술을 홀짝이던 이들이 하나둘씩 그들을 곁눈질했다.
못 보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앞에 선 주근깨 가득한 청년은 꽤 앳되어 보였지만, 험난한 여정을 해 왔음을 증명하듯 썩은 생선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뒤에 선 검은 눈의 남자는 태연해 보였지만, 베테랑 용병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묻어 나왔다.
몇몇 용병들이 그가 걸친 가죽 갑옷과 허리춤의 검을 훑는 사이.
“저 안쪽 자리가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리.” 이안에게 속삭인 필립이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태연하게 따르면서 이안이 말했다.
“꼭 구석에 앉아야겠냐?” “그래야 싸움이 나도 뒤를 잡힐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저번에 제가 죽을 뻔했던 것, 기억 안 나십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덤빌 테면 덤비라는 듯 장내를 훑는 필립의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의심암귀의 화신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마을을 거치고, 사이사이 노숙을 반복한 결과였다.
물론, 이안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필립의 몫을 꼬박꼬박 할당한 덕분이기도 했다.
몸에 새겨진 상처의 숫자만큼 세상에 대한 불신도 깊어진 것이다.
물론 이안의 눈엔 아직도 애송이였지만.
고작 보름여가 지났음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필립을 보면서 성기사의 종자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엔트리파워볼
둘은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뭘 드릴까요?” 그들을 지켜보던 여급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의욕이라고는 없는 태도에 피식대며, 이안이 물었다.


“식사로는 뭐가 괜찮지?” “괜찮은 건 없고, 먹을 수는 있는 걸 원하시면 소시지가 좋을 거예요. 빵을 시키실 거면 스튜를 꼭 같이 시키셔야 하고요. 그래야 삼킬 수 있거든요.” “그럼 그것들 전부.” 고개만 끄덕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속삭였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쩌실 겁니까?” “왜 자꾸 속삭이는 거냐?” “남들이 들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들어도 상관없어. 오히려 태연해야 더 신경을 안 쓸 거다.” “…또 하나 배웠군요.” 뭘 맨날 배우고 난리야.
실소한 이안이 장내를 돌아보았다.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실 거의 전부로 보였다.
“며칠 머물면서 분위기를 좀 볼 거다. 겸사겸사, 푼돈도 벌고.” “일단은 이 사이에 섞여들겠단 말씀이시군요.” “갑자기 나타나서 실종된 병사에 대해 묻고 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수상하니까.”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사이, 여급이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테이블에 음식이 놓였다.
여급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시지를 한 입 먹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먹을 수만 있군.” “믿으세요. 다른 건 더 별로니까.” 여급의 체념 섞인 말을 들으며, 이안은 품에서 은화를 꺼냈다.
이렇게 많은 팁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여급의 눈이 커졌다.
이안의 말이 이어졌다.
“보아하니 일거리가 꽤 많은 모양인데. 괜찮은 의뢰를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가 보기라도 할까, 재빨리 은화를 품에 챙긴 여급이 목소리를 낮췄다.
“곧바로 큰 건을 받으시면 충돌이 있을 거예요. 여긴 보기와 달리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서요. 아예 남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위험한 일이면 모를까. 작은 것부터 시작하셔야 해요.” 받은 만큼의 의리가 눌러 담긴 조언.
이안이 미소 지었다.
“잘됐네. 내가 원한 게, 바로 그런 위험한 의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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