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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석.
박혀 있던 검이 손쉽게 뽑혔다.
이안은 거의 못 쓰게 된 검을 내려놓고는, 깨진 뼛조각으로 뒤덮인 두개골의 정수리로 손을 내밀었다.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가 뼛조각 하나를 집어 든 순간.
쉭-! 엔트리파워볼
눈구멍 안에서 작고 새카만 무언가가 화살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직도 뭐가 남았다고…?
생각보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안은 날아오는 것을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움켜쥔 손아귀에 뭔가가 꿈틀댔다.
따끔한 통증이 뒤를 이었다.
“……?” 이안의 눈썹이 내려앉았다.
통증 때문이 아니라, 몸속으로 밀려드는 마력 때문이었다.
음습하고 끈적한 오염된 마력.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영문 모를 공포. 끝없는 증오와 분노가 해일처럼 치밀었다.
비명과 절규가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눈앞이 붉게 물들었지만.
“호오….” 이안은 그 광기에 조금도 휩쓸리지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랐을 뿐.
애초에 이 정도 원념으론, 그의 정신을 조금도 무너뜨릴 수 없었다.
플레이하던 게임 속에 망캐로 내던져지는 정도라면 모를까.
물론.
“…더럽게 시끄럽네.” 거슬리지 않는 것까진 아니었다.

콱, 이안은 손아귀에 힘을 줬다.
그리고는 손아귀의 무언가에게, 도리어 자신의 마력을 밀어 넣었다.
원념이 담긴 오염된 마력도 함께.
손아귀의 꿈틀거림이 거세졌다. 로투스바카라
왜, 똑같이 당하니까 좆같냐?
이안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력을 주입했다.
꿈틀거림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윽고, 손아귀가 잠잠해졌다.
“……?!” 진짜 이안을 놀라게 만든 변화는 그 순간에 일어났다.
손아귀에서 새로운 감각 기관이 생겨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몸속의 마력을 느꼈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손이나 발이 하나 더 생긴 것처럼 생경한.
심지어 이것에서는 감각뿐 아니라, 단순하지만 또렷한 감정까지도 전해졌다.
굴복. 그리고 복종.
‘의식이 있다고…? 그게 나한테도 전해지고?’ 더는 놀랄 게 없을 줄 알았는데.
감탄하며, 이안은 손을 펼쳤다.
손바닥 한복판.
검고 얇은 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뱀이었다. 5cm는 될까 싶은 가느다란 검은 뱀.
뱀은 깨알 같은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같은 감정이 전해졌다.

완전한 복종.
‘뭐, 내 애완동물이라도 된 거냐?’ 대꾸하듯 꼬리를 꿈틀댄 녀석이, 장갑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안은 재빨리 장갑을 벗었다.
뱀이 그의 중지를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꼬리를 깨문 채였는데, 영락없이 뱀의 형태로 세공한 반지처럼 보였다.
비로소 이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건…?’ 둘라한에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전리품이 이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유일 등급의 반지, 늪지의 원한.
일정 이상의 정신력과 지능 수치를 갖추지 않으면 캐릭터가 착란 상태에 빠지는 제약이 있었다. 막상 획득하는 1챕터에서는 사용조차 할 수 없던 물건이었다.
그 착용 제한 조건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심지어 진짜 뱀이었다니.
“방금 그건 뭐지?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던데.” 그때, 등 뒤에서 메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안면 가리개도 위로 올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이 오른손을 들었다.
“이 반지에서 나온 마력이오.” 메브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걸 그냥 손에 끼다니. 어차피 전리품은 전부 네 것이지만, 정말 괜찮은 거냐?” “보시다시피. 무사하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찬찬히 살핀 메브가, 이윽고 감탄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정말이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구나, 이안. 망령을 두들겨 패서 처치하다니. 직접 본 게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거다.” “나도 실제로 해 본 건 처음이오.” 피식 웃은 이안이 두개골의 뼛조각을 헤집었다.
“전리품은 내 것이라 하시니….” 이내 그의 손가락 끝에 익숙한 검은 구슬이 딸려 올라왔다.
또 다른 오염된 마력의 정수였다. 로투스홀짝
“이것도 내가 가지겠소.”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주머니에 정수를 넣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그 두개골은 내게 주겠나? 증거로서의 가치가 충분해 보이는데.” “기꺼이.” 이안이 두개골을 내밀었다.
메브가 혹시라도 부서질까, 조심스럽게 두개골을 받아 들었다.
금이 간 커다란 눈두덩이를 응시하던 그녀가 읊조렸다.

“고대 원혼에게도 힘을 주다니.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흑마법사의 속내를 누가 알겠소. 어쩌면 거창한 계획 따윈 없을지도 모르지.” 이안은 대충 대꾸하며 일어섰다.
어차피 죽을 놈의 목적 따윈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이제는 그저, 새로 얻은 반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을 뿐.
“…….” 메브의 침음이 이어졌다.
그저 나라의 앞날만을 걱정한다기엔, 지나치게 수심 가득한 눈빛.
마찬가지로 이안은 그녀의 사연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만나게 되면 다 알게 될 거요. 말 많은 놈이었으니.” 몸을 돌린 이안이, 고요한 언덕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 지금은, 필립이 살아 있는지나 확인하러 갑시다.” 타탁. 타탁.
모닥불이 어둠을 밝혔다.
필립이 식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꼬챙이에 꿴 육포와 햄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갔다.
한쪽에 앉은 이안은 그쪽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손가락에 낀 검은 반지를 묵묵히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만이 볼 수 있는 반지의 정보창을.
늪지의 원한. 이 반지는 그가 이 세계에 떨어진 후, 처음으로 손에 넣은 유일 등급 장신구였다.
성능 역시 그에 걸맞게 뛰어났다.
각종 능력치 상승도 그렇지만.
착란 상태를 유발하는 저주를, 약간의 생명력을 대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부분이 특히 그랬다.
이건 이 세계가 게임이었을 때에도 똑같이 붙어 있던 옵션이었다.
‘쏠쏠하게 써먹었었지.’ 그때는 근거리로 다가온 적에게 사용하여, 거리를 벌리거나 마법을 완성할 시간을 벌었었다.


일대 다수의 전투에서도 유용했다.
착란 상태에 빠지면 피아의 구별이 사라졌으니까.
현실이 된 지금은 더 많은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으리라.
‘저주가 어떻게 발현되는지 시험해 봐야겠군. 만약 내가 사용했다는 걸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안이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젠장할….”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어둠 너머에서 험상궂은 인상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구엘이었다.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그는, 모닥불 옆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주위로 흙먼지가 푸스스 피어올랐다.
“…….” 하지만 음식을 준비하던 필립은 인상만 찌푸릴 뿐, 그에게 핀잔까지 주지는 않았다.
부하들의 무덤을 파느라 저런 몰골이 되었기 때문이다.
육포를 툭툭 턴 필립이 다시 미구엘을 곁눈질했다. EOS파워볼
“후우….” 모닥불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망연자실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의뢰를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부하까지 전부 잃었으니까.
심지어 충실히 의뢰를 수행한 끝에 일어난 비극이었으니 더 허망할 터였다.
함께 싸웠던 필립은 그가 부하들을 구하려 얼마나 애썼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딱한 눈빛이 된 필립이,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료분들에 대한 의리가 대단하시군요. 다시 봤습니다, 미구엘.” 미구엘이 나지막이 코웃음 쳤다.
“의리는 무슨. 나 살자고 한 거요. 죽은 동료를 버리고 가는 건 재수 옴 붙는 짓이니까.” “그런 미신도 있습니까?” “나는 객사했는데 동료는 살면, 죽어서도 억울하지 않겠수? 그러니 잘 묻어라도 주는 거요. 악령이든 원혼이든 되지 않게. 시부럴, 끝까지 손이 많이 간다니까….” 투덜대는 것과 달리, 그의 눈빛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필립이, 대신 햄을 꿴 꼬챙이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메브가 고개를 젓고는 미구엘 쪽을 턱짓했다.
필립의 손이 냉큼 방향을 바꿨다.
“이거라도 드시죠.” “고맙소.” 사양 않고 꼬챙이를 받아든 미구엘이, 햄을 질겅대며 말을 이었다.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요. 또 무리를 다 잃다니…. 동료가 다 죽고 혼자 살아남은 게 벌써 세 번째요. 믿어지시오? 세 번이나 나만 살아남았단 말이오.” “운을… 타고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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